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암리 학살사건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||[youtube(Bc5tEne6v48)]|| || [[MBN]] 시사기획 맥 중에서 || [[1919년]] [[3월 1일]] 서울에서 만세시위운동이 일어난 가운데 제암리 인근의 개신교와 천도교, 유학자 지도자들이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여 3월 30일(혹은 4월 5일)에 제암리 인근 주민 천여 명이 제암리 발안 장터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일으켰다. 시위대가 [[일본제국 경찰]] [[주재소]]로 다가오자 [[육군]] [[헌병]]들이 출동해 경고 사격 후 칼을 마구 휘둘러 유학자 이정근과 그의 제자 2명이 칼에 맞아 사망했고 시위를 주도했다는 혐의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몇 명이 체포되어 [[고문]]당한 후 석방되었다. 사태가 이렇게 흘러가자 격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[[일본인]]들의 주택, 학교에 불을 질러 정미업자 사사키를 비롯한 수십 명의 일본인들이 대피했다. 사사키는 이에 앙심을 품고 스스로 자원하여 [[일본군]] 헌병의 길잡이 노릇을 하게 되었다. 이에 일본은 철저한 초강경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. 4월 2일 발안 장터 시위에 참여한 마을 주민들을 색출, 검거하기 위해 육군 헌병과 [[경찰]] 등으로 구성된 부대를 파병해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주민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. 일본 군경의 폭압에 제암리 인근 주민들은 더욱 격앙되었고 인근 화수리와 수촌리의 천도교와 기독교 지도자인 백낙열(白樂烈, [[1865년]] [[12월 20일]] ~ [[1937년]] [[1월 4일]])과 김교철(金敎哲, [[1880년]] [[7월 27일]] ~ [[1954년]] [[10월 6일]]) 그리고 주민들이 주축이 되어 4월 3일, 2차로 [[만세]] 시위가 일어났다. 이 과정에서 가와바타 도요타 [[순경|순사]]가 귀가 잘리고 치아가 뽑히고 척추가 꺾일 정도로 곤봉을 두들겨 맞아 사망하였다. [[일본인]] 남성 9명이 마을에 남기로 결정하고 40여명의 여성과 노인과 아이들이 산계리(三渓里)마을로 대피하였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